변호사의 삶

변호사의 삶 8. 모두가 스승이다.

도춘석변호사 2021. 5. 3. 13:08

변호사의 삶 8.

모두가 스승이다.

살아가는 매 순간 만나는 사람들이 모두 스승이다.

지난 글에서 변호사로서 법정에 선 첫 사건의 재판장님이 내게 변호사로의 자세를 깨우쳐 준 스승이라고 밝힌바 있다.

그런데 내겐 잊을 수 없는 스승님들이 더 계신다.

앞글에도 잠시 언급이 되었지만, 17년을 같이 했던 이재철 변호사님이 내겐 참스승이시다.

우선 이변호사님은 법관 출신이지만 가장 변호사다운 기질이 있는 분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변호사묵기(변호사다운 변호사를 일컫는 말로 일본어 무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은어)'의 표본같은 분이다.

이변호사님은 내게 변호사로서의 자세를 몸소 행동으로 가르치셨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변호사 시절 초기 사건에 동조되던 내게 사건과 변호사의 삶에 일정한 거리를 두라고 하신 것이다.

그 덕분에 다소 숨을 쉬고 살 수 있었다.

이변호사님과의 17년은 어쩌면 부부사이 이상으로 함께 한 사이였다.
그분은 내게 행동으로 중도의 길을 알려주셨다.

또 한 분은 부산대 로스쿨에 계시는 황용경 교수님이시다.

황교수님은 창원지법에 수석부장판사를 하시고 잠시 변호사 개업을 하셨다가 로스쿨이 도입되자 곧바로 변호사업을 접고 가르치는 업을 선택하신 분이다.

우선 황교수님은 법리에 밝으시고 늘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분이다(그 분처럼 공부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았을 테지만, 불행히도 내 게으름 탓에 공부를 못한 게 후회된다).

황교수님은 공부하는 자세만 가르친게 아니라 내게 자신감도 소중한 자산이란 것을 알려주셨다.

두 가지 일화가 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내 변호사 시절 초창기는 황야를 질주하는 총잡이처럼 달리던 시기였다.
그리고 난 총의 방아쇠를 마구 당기는 축에 들었다.
당연히 법원의 판사님들 사이에 내 평판이 좋았을 리 없었다.
"천방지축으로 나댕기는 변호사"정도의 평이 돌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수석부장이던 황교수님께서 "젊은 변호사가 자기 사건을 위해 저 정도는 물고 늘어져야지"라고 하시는 바람에 난 천방지축에서 열심히 하는 변호사로 이미지 변신이 가능했다.

또 다른 이야기 하나는 황교수님이 판사실로 오라고 하신 후 갑자기 파산관재인 선임을 하신 것이다.
난 당시 파산관재인이 뭘 하는지 전혀 몰랐지만, 황교수님이 선뜻 맡겨 주신 바람에 그후로 누구보다도 많은 파산관재인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지금도 창원지법에서 가장 큰 파산사건의 관재인을 맡아서 하고 있고,
변호사 전문 영역도 도산을 선택하고 있기도 하다.
변호사는 전문성을 갖추어야 하지만, 전문성은 해보지 않으면 갖추어 지지 않는 것이다.

변호사들 사이의 우스갯소리 중 하나 "입금되는 순간 전문성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있다.
맞는 말이다.
사건을 맡아서 파다보면 전문성이 생긴다.

황교수님은 내게 자신감과 공부하는 자세를 가르치셨다(그래서인가 황교수님이 로스쿨 교수가 된 것은 필연적인 길이 아닐까 싶다).

매 순간 스승님이 계셨고,
미처 내가 못 알아 본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 두 분을 스승으로 알고서 흉내라도 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글에서는 스승님의 존함을 밝히지 않았지만 이번 글에서 두 분의 존함을 밝히는 것은 내용상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분께 누가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지금 사무실을 같이하는 변호사님들, 현재의 스승님들
좋은 풍광은 더 말할 필요없는 또 다른 스승
이런 마음도 가르침의 결과

 

이변호사님과 함께 한 영덕에서의 추억

 

지금보다 십년전 쯤

 

파산관재인을 맡고 있는 회사의 전 모습

 

두 분 다 안계시지만 이분들이야 말로 가장 큰 스승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