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의 삶

변호사의 삶 13. 예기치 않은 삶의 전환

도춘석변호사 2021. 6. 2. 14:06

 

변호사의 삶 13.

예기치 않은 삶의 전환

내가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정말이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할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지나고나서 보니 어느새 이렇게 이십 년차 변호사의 삶을 살고 있지만....

어릴 적 이야기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늘 공부 잘하는 아이였다.
벼락치기에 참 능했던 것 같다. 중학교 때 당시는 한달에 한번씩 월말고사라는 이름으로 시험을 쳤는데, 시험기간 사흘 정도는 밤을 거의 새우곤 했다(우리 집이 가게를 했던터라 평소 공부에 열중할만한 좋은 환경이 아니었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을 했으나, 늦게 온 사춘기의 방황과 함께 집안 형편이 많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공부를 손에서 놓았었다.
그냥 가방만 들고 학교를 다니는 시늉만 했다(당시는 야만의 시대라 이런저런 이유로 참 많이도 맞았다).
세상 물정 몰랐었던 난 그냥 퍼뜩 졸업해서 아무 공장이나 들어가 얼른 돈을 벌어서 엄마를 좀 도와드려야 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고3이 되었는데 예외없이 모두 강제로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할 수 밖에 없었고(놀래야 같이 놀아 줄 친구가 없었다), 친구들이 긴장하여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조금 정신이 들었다.

일년을 어떻게해서 학력고사를 보고 점수에 맞춰 고대를 갔다.
전공은 2지망으로 선택했던 식품공학과였다.
부모님은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막내인 내가 대학을 입학하자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대학 생활은 혼란스러웠다(85학번인데, 그때는 시절이 정말이지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였음). 이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해서 사학년때 대기업 식품회사에 취업을 했다.

처음으로 내 힘으로 돈을 벌게 됐지만, 직장생활은 내게 전혀 만족을 주지 못했다.
삼년간의 짧은 직장생활에 환멸을 느껴 사표를 내고 나왔을 때, 정말 광야에 버려진듯한 느낌이었다.

사표내기 일년 전 어머니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슬픔이었다.
어머니가 없는 세상은 당시 내게 삶의 의욕마저 잃게 했다.
회사엔 아버지와 가까이 있겠다는 이유를 대고서는 밖에서 보기엔 잘 나가던 비서실 근무를 마다하고 마산에 내려와 일선 영업지점에서 화물차를 운전하며 영업사원(계장)으로 일년간 일을 했다.
일선 영업현장은 거의 매일 멱살잡이와 악다구니의 연속인 험한 일이었다.

그때 사표를 낸 건 도전이 아니라 어쩌면 도피였을 것이다.
외로웠다. 그리고 추웠다.
삼년의 직장생활을 정리하니 수중에 단돈 백만 원 안팎이 남았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나이 서른의 초라한 젊은이가 정처없이 길거리에 서 있었다.

사표를 내고 처음 생각한 대안은 공무원 시험이었으나 곧 마음을 바꾸었다.
직장생활에서의 불만족이 박봉의 공무원 생활을 한다고 달라질 리도 없었다.

결국 '모 아니면 도'를 택할 수 밖에 없었다.
사법시험을 거쳐 변호사가 되는 것이 유일한 돌파구로 보였다. 변호사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은 수입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가해자인 택시기사에 대한 수사와 그 이후의 재판 과정에 참을 수 없는 울분을 겪었는데, 스스로 힘이 없으면 아무리 절실해도 날 도와 줄 사람이 없음을 느끼게 되었다(당시 변호사를 만나 상담을 하였는데, 그분이 얼마나 사무적으로 대하든지 큰 상처를 받았었다. 그 당시엔 피해자측에서 별로 할 것이 없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때 참 서운했었다).

그러한 감정은 자연스레 그 누구와도 당당하게 상대할 수 있는 직업이 변호사라는 생각으로 연결되었다.

문제는 방법이었다.
난 당시 사법시험의 과목이 무엇이 있는 지도 몰랐다.
먼저 합격해서 군법무관을 하고 있던 친구를 강원도 인제까지 찾아가 사표를 낸 사실과 사시공부를 하고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둘이 토할 때까지 술을 마셨다. 당시 그 친구가 술에 취한 내게 "해봐라 니는 될 끼다"라고 말을 해 주었는데, 나중에 십년이 더 지난 후에 왜 그런 말을 했었냐고 묻자, 지가 그런 말을 했었냐고 하면서 기억도 못한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이는 게 그때 못하게 하면 내가 죽을 것 같아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단다.

난 그 친구의 격려(?) 그것도 술 취해서 기억도 안 나는 그 격려의 말을 붙잡고 각오를 다졌다.
다음날 아침 해장을 하고 헤어질 때, 그 친구는 내게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이란 제목의 고시 합격 수기를 적은 책을 읽어 볼 것과, 이 길로 신림동 '상원서점'을 찾아가서 교재를 추천받으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친구의 두 가지 조언은 옳은 것이었다.
그러나 난 집으로 가서 합격수기만 사서 읽었을 뿐, 신림동을 찾아 가지 않은 우를 범했다.
합격수기는 내 맘에 불을 지르는 데 분명한 불쏘시개가 되었다(그 친구도 그 책이 각오를 다지는데 도움이 된다고 봤을듯).

그 책을 외우다시피 읽은 것 까지는 좋았는데,
교재를 그 안에서 고른 것이 실수였다.
그 합격 수기들은 십년도 더 지난 합격기까지 있어서 그 책 내용에서 언급된 교재들은 그야말로 유행이 한참 지난 책들이었음을 아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창원에서 이 도서관 저 도서관을 옮겨 다니면서 오래된 책들로 공부를 하다가 일년쯤 지난 뒤에 신림동 고시촌을 찾아가게 되었다.
형님들이 공부를 하는 동안 내내 뒷바라지를 해주셨기에 막막한 수험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고, 내 합격에 있어서 절반의 공은 형님들에게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미친듯이 공부했고,
정말 그때는 다른 생각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아찔했고, 운이 따라서 이 자리에 와 있는듯 하다.

가끔씩 내 인생의 가지 않은 길은 어디로 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분명 다른 어떤 길도 있을 수 있었겠지만, 난 그때 다른 길은 없다고(낭떠러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빈 자리가 자꾸 생각나는 밤이다.

절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다.

 

21년 5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