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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의 삶

변호사의 삶 4. 볼펜 한 자루 값

도춘석변호사 2021. 5. 3. 12:56

변호사의 삶 4.

볼펜 한 자루 값

오늘 불편한 일이 있었다.

중학교 친구의 소개로 이틀 전에 상담을 한 고객이 다시 찾아 왔다.
오늘은 소개한 친구가 함께 왔다.
다른 약속을 조정해서 급하게 상담을 했다.

이틀 전에 왔을 때 동업계약 관계를 파기하는 것에 대한 상담을 했었다.
난 변호사를 하는 동안 제대로 된 동업을 본 적이 없다.
처음엔 상호 필요에 의해 동업을 시작하지만, 보통은 불분명한 상태로 대충 계약하고 결국은 분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그래서 난 동업 자체를 하지 마라고 조언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업관계를 파기할 때는 그 책임 소재와 함께 자산과 부채를 배분하는 문제 향후 사업권을 누가 가질 것이지 등등 상담의 범위가 정말 복잡하다.

친구의 소개로 온 손님이고 처음 관계를 맺는 터라 정성을 다해 상담을 했고,
앞으로 대응방안도 충분히 설명했다.
상담후에 상담료 이야기가 나올 때, 계속 상담이 필요한 상황으로 보여 향후 고문관계를 맺는 것이 어떻겠는지 말하였고 손님도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래서 그냥 가라고 하였다.

근데 이틀만에 친구를 대동하고 온 손님은,
내가 조언한 후 동업 상대방과 협상을 해서 동업관계를 합의로 해제하고 새로운 청산 합의를 하기로 했다면서 간단한 내용으로 된 계약파기합의서를 준비해 왔으니 검토해 달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좀 나눈 후 준비해 온 계약서를 살펴보니 이건 또 다른 분쟁을 담고 있는 내용이다.
이럴땐 아예 계약서를 직접 작성해서 주는 것이 빠르고 효과적이다.
결국 합의서를 완전히 새로 작성해서 주었다.

고객이 합의서를 받아 들고선 비용을 언급하는데,
고문관계를 맺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이미 급한 불은 꺼진 상태라고 보는듯 싶다).

변호사라면 공감되겠지만 계약서 작성은 시간당 상담료를 받는 것 보단 훨씬 고도의 작업이다(향후 책임 문제도 있을 수 있고 AS도 있을 수 있기에).

고객에게 웃으면서 비용이 상당할 것 같은데 괜찮겠냐고 하니 얼마냐고 묻는다.
이럴땐 참 어렵다.
결국 두번에 걸친 상담 시간만 계산해서 청구를 했다.
근데 고객이 그 비용도 많다고 한다.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화가 났다.
처음부터 비용을 분명히 하지 않고, 친구가 소개한 사람이라고 모든 걸 다해준 게 문제다.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을 다스렸다.
깨끗이 포기하고 그냥 가시라고 했다.

내가 변호사를 개업한 직후의 일이다.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던 친구가 찾아와 자기가 직접 재판을 하고 있는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을 좀 맡아서 진행해 달라는 것이다.
형편이 안 좋으니 무료로 맡아 달라고 한다.

이십년 이상 못보던 친구가 갑자기 나타나서....(그 친구는 학교 다닐 때도 내게 잘 대해 준 적도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는 사무실에 소속된 변호사라 내 맘대로 무료로 사건을 수임할 형편도 아니었다.

해서 그 친구에게 안 된다고 하면서 돌아가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오히려 화를 내면서 날 쏘아 붙였다.
"니는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거 좀 사용하면 되는 건데 무슨 비용이 드노. 종이하고 볼펜만 있으면 되는데..."
난 그말을 듣고 더이상 말을 섞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다신 찾아 오지 말라고 하고 돌려 보냈다(근데 그 친구 일년 전에 다시 찾아와 자기가 새로이 소를 제기할 입장인데, 착수금은 줄 형편이 되지 않으니 소송에 이겨서 일부를 비용으로 받으면 안 되겠냐고 했다. 난 다시 돌려 보냈다).

그 친구의 그 말은 이십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 친구는 변호사가 제공하는 용역의 원가는 볼펜 한자루도 안 된다고 본 것이다.

오늘 사무실을 나간 그 손님은 다신 내 사무실을 찾지 않을 것이다.
제대로 된 비용을 치루지 않은 부담이 있기에 다음엔 미안해서라도 찾지 않게 된다.

난 일을 해 주고 비용도 받지 못하고 또 고객도 잃은 것이다.

우린 눈에 보이는 재화에 대해서는 당연히 대가를 치르면서 전문직이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선 값을 제대로 치루는 것을 부담스러워 한다.

물론 이 이야기에 대해선 변호사와 비변호사의 입장이 완전히 다를 것이다.

의뢰인의 입장에선 변호사가 아무런 기준도 없이 마음대로 값을 부른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이 부분에 대해선 다음에 별도의 꼭지로 한번 언급할 계획이다).

제대로 된 서비스를 누리기 위해선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전문직은 그러한 수준이 되는데 엄청난 기회비용이 투입되는 것임을 알아 주면 좋겠다.

 

2021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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